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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폐 소생술 자격증이 있지만 하지 않는 이유 (페북 펌)

유용한 정보와 분석/사회.

레프트 윙어. 2023. 10. 21.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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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는 권장되지만 악법은 강제된다. 나는 심폐소생술 자격증을 갖고 있지만 어쭙잖은 이타심이나 공명심으로 내 인생 망치지 않기 위해서 모르는 사람이 쓰러지면 그냥 지나쳐야 한다고 가끔 마음을 다잡는다. 비행기를 타면 가장 먼저 술을 시켜 마신다. 여기서 '있지만'은 '있어서'의 엄밀하지 않지만 그나마 이해하기 쉬운 대체 표현이다.

자격증만 없으면 침을 놓거나 팔다리를 주무르는 등의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을 해도 모든 게 선의로 해석되지만, 그깟 자격증을 하나 갖고 있기만 하면 그걸로 연금을 주는 것도 아닌데 하는 행동 모두가 악의로 해석되어 버리거든.

그러니까 가슴 압박을 분당 100회 이상으로 해야 되는데 97회까지밖에 하지 못한 아니 '않은' 녹화 영상이 법정에서 공개되면 나는 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피고(민사)/피고인(형사)의 변명을 준비해야 한다. 딱히 이유가 없었는데 음악이 없어 텐션이 느려진 거였다면 판사는 '좋은 뜻에 나서준 건 대단한데... 자격증도 있는 사람이 기본을 지켜야지 기본을!' 하면서 대충 무슨 무슨 죄 읊어주지 않을까.

나에겐 98회보단 0회가 훨씬 안전하다. 환자에겐 0회보단 50회라도 도와줬으면 나았겠지만 말이다.

가상 법정에 서 보니 따지고 보면 내 잘못인 것 같기도 하다. 비록 80세 고령에 심근경색과 신부전 그리고 간질을 앓고 있다고는 하나 너무 멀쩡하게 정정한 분이, 저녁에는 나와 함께 발견되어 갈비뼈가 부러진 채로 냉동고에 들어가 있다니 말이다. 범인은 현장에 다시 방문한다.

이것이 목격된 심정지인지 가격한 심정지인지 내 말만 믿을 수 있냐는 거다. 어쨌든 누군가는 이 정정한 노인의 죽음에 책임도 지고, 봉양은 안 한 독거노인이지만 마음속으로는 존중해왔던 가족들의 생계에도 보탬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중국에서 폭행당해 쓰러진 사람을 구해줬더니 부러진 갈비뼈에 대한 보상은 물론이고 사라진 폭행 가해자로 대신 지목까지 당해 그 사람의 인생을 책임져줘야 했다는 기사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 후로 중국에서는 인파 속에서 쓰러져도 아무도 구해주지 않고 지나치는 광경이 기본이 되었다. 물론 시민의식이 높아지면 그 자체로 독재 체제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한 중국 정부의 의도적인 설계일 수도 있지만, 의도야 어떻든 결과적으로 모든 사람이 손해 보는 게임이 된 것은 분명하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많아지다 보면 나도 도움을 받지 못하고 죽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하지만 팃포탯 전략은 모두가 서로를 공동체로 인식하는 작은 공동체에서나 먹힌다. 국가급의 커뮤니티에서는 먹튀가 가장 좋은 전략이다. 이런 나쁜 균형을 해소하는 것은 정치가와 그들을 뽑는 국민 전체의 몫이지 개인이 전략을 수정해서 고칠 수는 없다. 중국에서 태어나 군중 속에서 고독사한 개인이 탓할 대상은 결국 중국이듯이, 한국에서 태어나 같은 배를 탄 이상 내가 탓할 대상도 없다. 한국은 세월호 교장이 '책임을 지고' 사퇴하는 나라 아니었던가. 누군가는 상황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그 생각이 책임질 수 있는 사람들을 없애버렸고, 책임질 상황을 없애는 희망 하나조차 꿈꾸지 못하게 만들어버렸다.

이렇게 실컷 남 탓을 하면 된다. 내가 거기 있었던 남이 아니면 되니까. 심폐소생술 자격증을 따고도 피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은 사람이 악으로 보이겠지만, 대한민국 국민으로 태어나 그 많은 시간 학원을 다니고 롤을 하면서도 심폐소생술 자격증 하나 따 두지 않은 '선량한 무능력자'들이야말로 가장 악한 이기주의자가 아닐까? 앞사람이 문을 잡아주면 뒷 사람이 지나가면서 문을 열어줘야 하는데, 차마 문을 놓지 못하고 뒷 사람 수십 명이 지나가길 기다리다가 결국 놔버려서 100번째 사람이 문에 부딪히면 나머지 98명의 사람이 첫 번째 사람을 비난한다.​ 그것이 조선의 풍경이다.

원글 출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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